에드워드 윌슨은 사회생물학의 아버지다.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의 학제간 통합을 주창하는 통섭(統攝, consilience) 개념을 창시했으며, 유발 하라리가 대중화시킨 빅 히스토리의 개념적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창의성의 기원>은 그의 지론인 학제간 통합,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을 통해 창의성의 개념을 확장할 것을 촉구한다.
윌슨에 따르면 과학적 설명은 근접 원인과 궁극 원인을 둘 다 포함시킨다. 반면 인문학은 근접 원인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것이 현재 인문학 빈곤의 원인이자 창의성의 폭발을 가로막는 이유다. 여기서 근접 원인은 '무엇'과 '어떻게'에 해당하고 궁극 원인은 '왜'에 해당한다. 과학적 설명에 있어서 궁극 원인은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끔 진화를 현재 상태로 유도한 사건들'이다. 인문학에서의 궁극 원인은 무엇일까. 윌슨이 정곡을 찔렀다. 종교의 근본적 교의거나, 고대 외계인이거나, '두렵고도 매혹적인 신비'가 그간 나열되었던 후보들이었다. 인문학은 겸손을 가장한 불가지론으로 궁극 원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지만, 실상은 과학중심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린 게 아닌가 싶다.
핵심은 진화를 과학과 인문학 중 과학의 카테고리로 볼 것이냐 혹은 이미 주어진 것, 즉 기본 전제로 볼 것이냐의 차이다. 윌슨은 이 문제가 더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만물이 인간 이해의 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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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문학의 그 어떤 것도 진화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과거 인문학이 주도해왔던 많은 영역들이 과학적 성과에 의해 부정되거나 재구성되었다. 신화는 과학에 의해 해체된다. 신에 의해 관장되던 우주의 신비는 첨단 물리학으로, 인내의 미덕을 강조하며 단순반복을 강요하던 전통적인 학습법은 인지과학에 입각한 최신 학습법으로 대체되었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신이 정한 목적과 의미를 이야기하는 모든 신화를 지져 녹이는 산이다.
인문학은 그 성격상 시간이 갈수록 과학에 영역을 뺏기고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과거 인생에 비유되며 시적 담론의 대상이었던 바둑은 알파고 이후 정확한 계산과 데이터가 중심이 된 멘탈 스포츠가 되었다. 감에 의존하던 야구 역시 세이버 매트릭스 혁명과 함께 데이터와 과학의 스포츠가 되었다. 바둑과 야구의 낭만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부정할 경우 진화에서 도태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예시만 다를 뿐 지난 수만년간 인류가 진화해온 과정과 유사하다. 물리적인 실체 뿐 아니라 개념도 진화한다.
인문학의 단점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주의라는 점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가치만 강조한다. 이는 아직 인류의 지식이 한정적일 때만 유효한 접근방법이다. 현재의 우리는 인류의 먼 조상으로부터 유전적, 문화적 진화를 통해 오늘날의 문명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다. 신석기 혁명 이후의 역사 시대에만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본 인간,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선사시대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그로부터 이어져 왔다. 윌슨은 정확히 표현한다. "역사가 문화적 진화의 이야기이고, 선사시대가 유전적 진화의 이야기"다.
흔히 인문학적 용어로 분류되는 창의성 역시 진화라는 큰 물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이러니는 인류만이 지닌, 수사학적인 특성을 지닌 감정 형질로서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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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 질시, 보복은 동물적인 감정이다. 수천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의 시상하부를 비롯한 감정 통제 중추들에 이미 자리를 잡은 본능적 프로그램의 일부다. 아이러니는 그것과는 다르다. 언어를 통해 조성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일어난 문화적 진화를 통해 상당한 수준까지 다듬어진 것이고, 우리 대뇌가 더 평온한 상태일 때 만들어 낸 우리만의 것이다.
한때 우생학으로 대표되는 과학만능주의적, 결정론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친 환경결정론이 득세하던 시절도 있었다. 맥락에서 떨어진 일부 사실의 강조나 윤리적 우월성을 내세운 당위의 강조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둘다 정치적 의도에 복무한다는 점에서만 성공적이다. 과학과 인문학 모두 진화의 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했던 역사를 공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자각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판단하는 준거가 된다. 우리가 이제껏 인문학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프레임으로 바라보았던 많은 사건들은, 궁극 원인의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념, 윤리, 당위가 아닌 트레이드 오프로서의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이같은 관점은 흔히 현재의 현실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계열, 특히 좌파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과학 일반과 특히 진화심리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계의 격렬한 반발도 유사한 맥락이다. 이들은 진화론자들이 사실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져있다고 가정한다. 정작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그들에게 더 필요해 보이지만 말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기이해'다. 인문학과 과학 모두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에 기여해왔다. 이제껏 지구 상에 존재했던 수백만 종의 생명체 중에 오직 인간이 누리고 있는 문명은 지금까지 그것이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앞으로도 과연 그럴까?
최근 과학의 자기이해가 우리 주변의 생활에서 체감될 정도라면 인문학은 지금 어디쯤 온 것일까. 과학은 과거와 현재까지의 사실을 기술하고 오류가 발생했을 시, 그에 대한 자가 수정 기능을 작동한다. 인문학은 감히 과학이 가보지 못하는 길, 미래의 길을 상상하며 언젠가 과학이 갈 길을 예비한다. 그 중에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과학에 의해 폐기된 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폐기된 길은 다음 단계의 길을 위한 자양분이 되어줄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진화 모델이다. 오늘날의 인문학은 과연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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